밥보다 진심 (1)

[정신의학신문 : 김재원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엄친아’도 피해 갈 수 없는 감정의 늪 건너기

_ 수치심 vs 죄책감

 

정신분석 발달이론에 따르면 감정에는 ‘성숙한’ 감정과 ‘미성숙한’ 감정이 있다. 감정의 발생 시점으로 성숙과 미성숙을 구분하기도 하는데 죄책감은 수치심에 비해 성숙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생후 15개월 정도부터 느낄 수 있다고 하고 죄책감은 만 3~6세 정도부터 느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성숙한 감정인 수치심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자기존중감과 연결된다. 결핍감을 느끼며 이것이 자기에 대한 가치로 연결돼‘나는 못난 사람이야’와 같은 자기 비하나 자격지심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수치심이 지속돼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뿐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자신감을 잃는다. ‘이렇게 못난 나를 누가 받아들여줄까?’와 같은 생각은 자연스레 거절당할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선뜻 관계를 찾아 나서지 못하게 한다.

 

어려서 천식을 앓았던 나는 조금만 달려도 숨차했다. 가끔 떠올리는 어릴 적 기억이 있다. 다섯 살 정도였을 것이다. 여러 가족이 바다로 소풍을 갔다. 백사장에서 또래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점점 뒤처지며 꼴찌가 될 것이 분명해지자 결승선에 들어오기 전에 엎어져서 울어버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화나고 실망스러운 표정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맞다. 그때의 감정은 분명 수치심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수치심.

어려서부터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무엇이든 맞부딪혀서 싸우기보다는 도망가고 피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망가고 피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섯 살 때의 기억과 어머니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떠올리며 맞서 도전해 극복할 용기를 스스로 끌어올렸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수치심(에 대한 두려움)은 나의 힘’이 되었다.

이렇게 수치심을 자신을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수치심의 기본 속성상 자기모멸감이나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이어질 위험이 더 크기 때문에 수치심은 다루기가 쉽지 않은 감정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수치심을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거울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은 점차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한편 죄책감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여기서 초점은 우리의 ‘행동’이다.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존재와 가치가 손상되지는 않는다. 자아와 자기존중감은 온전히 지켜진다는 점에서 죄책감은 수치심보다는 안전하고 성숙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그렇듯 건강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빠질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아, 또 실수했어. 그렇게 부단히 연습을 했건만.”

“아, 또 틀렸어.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건만. 이번에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쉽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을 자주 본다.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의 기대 수준이 높아서 시험에서 만점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잘했어도 칭찬은커녕 꾸지람을 듣는다는 아이들도 자주 만난다. 소위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로 머리, 성격, 외모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아이들인 데도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

부모의 요구에 맞추어 세운 완벽한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들이는 힘과 노력은 언젠가는 소진되기 마련이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실수를 할 수 있는데 엄격한 잣대에만 자신을 맞추다 보면 정말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서도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심하면 자기 처벌로 이어지기도 한다.

죄책감을 건강하게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처벌’을 ‘자기 용서’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잘못이나 실수를 엄격하게 처벌하기만 하면 죄책감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자신을 책망하는 감정은 자연스럽지만 자책만으로는 말과 행동을 바꾸지 못한다. 잘못이나 실수에 집착하기보다 그것을 바로잡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면 자기 처벌의 감정은 자신에 대한 용서로 자연스럽게 바뀔 수 있다.

적절한 죄책감은 내가 잘못한 말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판단하면서 바로잡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잘못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하고 대처하는 책임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 2편에서 계속됩니다.

* 본 칼럼은 <<밥보다 진심>> 중 ‘감정에도 성숙과 미성숙이 있다’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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