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렌즈 (8)

[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필자가 공부에 치여 ‘살아가는 건지’, ‘살아지고 있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은 채 삶에 휩쓸여 가고 있을 때 매트릭스가 개봉하였다. 필자에게는 매트릭스라는 설정 자체가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답은 모르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매트릭스가 아닐지?’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에 대한 답변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주제였고, 살면서 마음 한편에 계속 품고 있는 의문으로만 남았었던 거 같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품고 있던 그 의문들이 나를 ‘인지신경과학’, ‘진화심리학’, ‘정신의학’이라는 세 학문으로 이끌었던 거 같다. 나도 모르게 빠져서 공부를 무지하게 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마치 모피어스가 네오를 만나 ‘빨간약과 파란약’을 건네면서 했던 대사처럼 말이다.

“네가 왜 여기 왔는지 말해주지. 뭔가를 알기 때문에 온 거야. 그게 뭔지 설명은 못해. 하지만 느껴져. 평생을 느껴왔어. 뭔지는 모르지만 세상이 잘못됐다는 걸 말이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자넬 미치게 만들지. 그 느낌에 이끌려 온 거야.”

사진_네이버영화 '매트릭스' 스틸컷
사진_네이버영화 '매트릭스' 스틸컷

 

그렇다. 삶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거 같긴 한데, 그 명제를 인정하기에는 내 삶이 그렇게 녹녹지 않게 느껴져서 일 것이다. 평생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고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계속 살아‘졌’었다. 물론 영화라는 예술의 해석 여지는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인지신경과학’, ‘진화심리학’, ‘정신의학’이라는 세 학문에 푹 파져, 이 세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지점이 빨간약이라고 믿는 한 정신과 의사의 관점에서 영화 매트릭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최근 인지신경과학에서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라는 명제를 지지하는 실험 결과들이 많이 쏟아지고 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많은 심리가 개인의 선택으로서가 아니라, ‘진화’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신의학에서는 ‘인간의 99%는 무의식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필자는 이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 매트릭스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99%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가리고 있는 주체는 무엇일까? 영화에서는 그 주체를 AI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 주체가 본인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걸 깨우치는 지점에서부터 삶의 많은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필자가 한 경험이 조금이나마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고자 한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매트릭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란 말이지. 네가 노예라는 진실.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감옥에서 태어났지. 네 마음의 감옥. 불행히도 매트릭스가 뭔지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직접 봐야만 해.”

 

필자도 동의한다. 수년 동안 강의랑 글, 동영상 등을 통해 말로 설명을 했지만 오롯이 전달되지 못한다는 경험을 많이 하여서 이에 대한 답답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 영화처럼 진실을 보게 하는 빨간약이 실제로 존재했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또다시 말로 전달해 보고자 한다. 어느 누군가는 이 글이 계기가 되어 그 세계를 직접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사진_네이버영화 '매트릭스' 스틸컷
사진_네이버영화 '매트릭스' 스틸컷

 

먼저 매트릭스의 세계관은 실제로 가능할까? 우리는 AI가 만들어낸 전기 신호와 진짜(real)를 구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 모피어스는 매트릭스 안에서 네오에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준다.

“what is real?(진짜가 뭔데?)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데? 촉각, 후각, 미각, 시각을 뜻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자신호에 불과해.”

맞다. 우리의 뇌는 딱딱한 두개골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뇌는 단 한 번도 실제 세계와 마주한 적이 없다. 단지 각 감각기관이 주는 전자신호를 받고 해석할 뿐이다. 지금 이 글에서 느껴지는 검은색은 진짜인가? 우리는 검은색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그 근거만으로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 세계에는 색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빛의 파장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뇌는 각 파장마다 색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색맹이 있는 사람이 보는 세계는 가짜인가? 초음파로 세계를 보는 박쥐는 가짜를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다 각자 자기가 ‘해석’한 세계를 보고 있을 뿐이다. 몇 년 전에 SNS에서 색깔 논쟁을 빚은 원피스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흰색, 금색이 진짜인가?’, ‘검은색, 파란색이 진짜인가?’ 답은 두 개 다 진짜가 아니다. 단지 각자 뇌가 해석하고 있는 신호일뿐이다. 착시와 관련해서 1시간 동안 강의를 했던 적도 있을 정도로 관련된 사례들은 넘쳐난다. 분명한 건 ‘우리는 실제(real)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해석한 신호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매트릭스 세계관은 실제로 가능하다. 뇌가 보고 있는 ‘신호’만 조작을 한다면 우리가 보는 세계를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신호를 누가, 왜, 어떻게 조작하고 있길래, 우리는 내가 사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온전한 주체로 여기기에 한계를 느끼는 것일까? AI 따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건 영화의 설정일 뿐이지, 지금 현재로서는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과학(인지과학, 진화심리학, 정신의학)에 따르면 스스로가 본인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과학 수준으로는 옳은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본인이 스스로를 덫에 가두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몰라서 그런 것이다.

인간 정신세계의 대부분은 무의식에서부터 온다. 그리고 그 무의식은 진화 역사에 의해 누적되어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뇌 안의 소우주인 무의식을 잘 보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한다. ‘무의식’이라는 말 자체에 우리 스스로가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존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가짜’ 생각들을 ‘진짜’라고 여기면서 살고 있다. 필자는 왜 의식적인 생각을 ‘가짜’라고 주장을 하는가? 그 이유는 의식은 ‘사후’ 판단 체계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 내 생각, 감정, 행동의 진짜 이유는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짜 이유를 보지 못한 채 이미 생각, 감정, 행동이 일어난 사후에 해석한 ‘의식이라는 생각’을 ‘진짜’라고 착각하면서 우리는 살고 있다.

 

원인과 결과에서 절대로 뒤집을 수 없는 것은 시간의 선후 관계이다. 원인은 항상 결과 이전에 선행하여야 한다. 이건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런데 ‘의식’은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에 선행할 수 없다. 항상 ‘사후’에 해석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진화 역사에서 중요한 건 진실보다는 ‘속도’였기 때문이다. 의식이 사후 판단 체계에 불과하다는 건 많은 인지신경과학 실험 결과에서 지지되고 있는 사실이다. 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매트릭스 2편에 오라클은 네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선택은 이미 했지. 선택한 이유를 알아야 해.”

진실을 담고 있는 한 문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시간의 선후로 보면 ‘무의식 - (생각, 감정, 행동) - 의식’이라는 프로세스로 인간의 정신세계가 이루어져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스스로 가둔 덫인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의식은 사후에 만들어낸 가짜 이유라는 진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생각, 감정, 행동 이전에 있는 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라클이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선택은 이미 했지. 선택한 이유를 알아야 해.”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필자는 이것을 깨닫고 난 후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필자뿐만 아니라, 필자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 내담자들도 이 지점을 깨닫고 내담자의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경험을 상담자로서 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친절하게도 영화에서 그 답을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준다.

“Don't think you are, know you are.(네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마. 네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해.)"

스스로 만든 매트릭스를 벗어나게 할 key와 같은 문장이다. 이 문장만 온전히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감히 제 목숨을 걸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상기 문장의 의미와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분은 지면 관계 상 다음 편에서 이어가 보고자 한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본 글은 쿠키건강TV 마인드온 - 정신과의사 이일준의 심리학 렌즈 33회 ‘정신과 의사가 본 영화 매트릭스’ 방송분의 일부입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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